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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6일 일요일

감나무 한국사진방송 정해영 기자


감나무









가을이 노랗게 떨어져 뒹굴던 길가에 어느덧 겨울비가 흩뿌리고, 차창 밖으로 그리운 추억들이 방울방울 매달렸다가 맥없이 흘러내린다.

오늘 아침 집을 나오다 보았던 앙상한 나뭇가지에 고문을 당하듯 매달려있던 얼어버린 감들이 갑자기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집 주인의 별다른 취미 때문일까? 아니면 워낙 바쁜 생활 속에 감을 따서 이웃과 나눠먹는 즐거움마저도 낼 틈이 없어서 일까?

우리 집 감나무는 올해는 왜? 다 낙과가 돼서 나를 서운하게 만들었을까?
의문에 답을 구하기도 전에 피난시절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다.
우리는 강화도가 건너다 보이는 나루터 동네에 인심 좋은 할머니 댁에 여섯 식구가 작은방을 하나 거저 빌려서 피난살이를 했었다.

그때 나는 어린 나이지만 벌써 배고픈 고생이 고생 중에 제일이라는 것을 쓰라리게 느끼며 살았다.

푸성귀도 없는 겨울에는 도토리를 주어다가 삼사일 물에 불려서 떫은맛이 조금 가시면 쌀 한톨 넣지않고 사전에도 없는 도토리만으로 밥을 만들어 하루세끼를 이어 가던 시절이었다.

그 해(1.4후퇴) 겨울이 지나고 봄이오니 언 땅을 뚫고 들판에 냉이랑 달래랑 먹을 수 있는 나물들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누나들을 따라 나물을 캐러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다.
또 여름철에는 굴 따기, 조개 캐기, 게 잡기 등의 경험도 했다.
배는 곱아도 이런 일들은 나를 너무 즐겁게 했다.

그러나 도토리 밥만은 정말 싫었다.
결국은 형은 도토리 밥을 거부하고 굶기를 밥먹듯 하더니 어느 날 가출을 했고. 얼마 후에 인근 미군 부대에 하우스보이 가 돼서 가끔 집에 올 때는 미군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모아 가져와서 가족의 혀를 놀라게 해주었다.

그래도 가을이 되니 들판은 더욱 풍성해지고 메뚜기잡기, 이삭줍기, 머루, 다래, 으름 등 산열매 따기 등으로 하루해가 짧은 것만 같았다.
누나들은 억척같이 나까지 데리고 다니며 자연이 주는 혜택을 최대한 이용해서 식량을 모았다.

초가을부터 주인 집 마당에 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감을 주워서 익혀 먹는 일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익은 감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아버지께서 주인이 버리는 것도 아닌데 떨어진 것이라도 먼저 주워서 먹는 것은 도둑질과 같은 것이라며 떨어진 감을 줍는 일을 엄하게 금하셨다.

그러나 연시가 떨어지지 시작하자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떨어진 감이 보이기만하면 얼른 " 할머니 감 떨어 졌어요"하고 주어다드리면 어쩌다 한번씩은 입에서 살살 녹는 연시를 "이번엔 너 먹어라"하고 주시기도 했는데 그때 그 감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그 후 서울 만리동에 감나무골이라고 불리던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추억은 정말 내게는 힘이 들었다.
별로 굶는 날은 없었지만 뱃속은 언제나 허전한 것 같았다.
난 새벽마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떨어진 감을 주워 모았다,
소금물에 넣었다가 먹거나 항아리에 넣었다 먹으면 고픈 배를 채우기에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감나무가 좋았다. 언제나 외롭고 쓸쓸할 때는 감나무에 기어올라가 가지에 걸터앉아 감잎을 따서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빨리 어른이 되면 돈을 많이 벌어서 나처럼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가며 살아야겠다"하고 몇 번이고 다짐을 했었다.

그때까지 어려서 창피한 걸 모르고 살았었는데, 철이 들다보니 거적문을 펄럭이며 허리를 굽혀야 들고나는 천막집에 사는 것도, 떨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모두가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는 친구네 집엔 가능하다면 놀러 가지 않았고 식사 때가 가까워 지면 더욱 놀러 가는 일 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내 스스로 먼저 누구를 만나자고 하거나 전화를 거는 경우도 별로 없다.

그 때의 기억 때문이지 난 지금까지도 그냥 혼자 있는 것이 남들과 필요 없이 어울려 다니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내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른이 됐지만, 돈을 많이 모으는 일에는 실패를 했다.

돈이 돈을 번다고 했던가? 내 성격에 빈손으로 시작해서 돈을 모은 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작은 기회가 온 적도 있었지만 내가 잘 되자고 남에게 피해를 입혀가면서 돈을 벌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꼭 천사 표로 산 것 만은 아니다.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는 양심에 찔리는 일을 한적도 있지만, 세상을 원망하기보다는 힘이 없는 자신에게 스스로 분개하면서 참고 살았다.

지금도 어릴 적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항상 나 자신을 괴롭게 한다.
차면 넘치고, 넘치면 주위를 더럽게 할 뿐인데 돈을 모으는 한계를 지나치게 높게 정하거나 정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는 배가 곱아서 빵을 훔치는 사람에게 생각 없이 돌을 던지기는 해도, 배불리 먹고 음식을 남겨서 버리는 것이 더 큰 잘 못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쓰고 남아서 남을 돕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려운 중에서도 안 쓰고 아껴서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손바닥만한 집을 장만하고 비좁은 공간에 제일 먼저 심은 것은 감나무다.
공간이 좁다보니 우리 감나무가 부실해서 인지 내 주위 사람들은 감을 추수하면 감나무가 있는 우리 집에도 감을 나누어준다.
우리 감나무도 내년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려서 이웃에게 작은 사랑을 함께 나눌 수가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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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jsundud@hanmail.ne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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