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록 화질은 떨어져 너저분한 느낌이 들겠지만, 사진은 화질만이 다는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어떤 면에선 거칠고 투박한 사진이 현장감이 넘치고, 더욱 호소력이 강할 수 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파트의 입구로 연결되는 긴 회랑은 사진적으로 촬영하는데 적격이었지만, 창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거나 나오는 사람을 조심하며 촬영을 하여야 되었습니다. 대로에서 촬영할 때는 건물의 움푹 패인 곳에 졸리를 끼워 넣어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습니다. 골목 안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아침 용변을 보러 나온 개들을 제외하곤 거의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여왕과 졸리가 골목 안을 스물스물 몰려다니는 요사스러운 기운을 극히 두려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요기는 지린내와 구린내였죠, 파리의 아침은 구린내와 지린내로 시작됩니다. 항상,
스릴이 있는 아침,
때로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위기를 느껴야 될 때도 있었습니다.
여름인데도 파리의 경찰들은 검은 제복을 단단히 챙겨 입고, 허리엔 굵직한 쇠방망이를 차고 있죠. 머리엔 번쩍거리는 헬멧을 쓰고, 검은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한 두명도 아니고, 때로는 10여 명씩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순찰합니다. 검은 제복의 자전거 행렬이 나타나면 누드 촬영을 안 할 때도 괜스리 주눅이 들곤 했죠. 이렇게 벗고 거리를 헤매다 저들에게 걸리는 날엔 우선 그 쇠몽둥이의 세례를 받아 유치장으로 가기 전에 초죽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일단 꽁꽁 숨었다가 그들이 멀리 사라진 후에야 다시 거리로 나서곤 하였습니다.
리옹역 근처의 공중정원도 돌고, 바스틸 오페라 극장 주변과 보주 광장도 돌았습니다. 보주 광장에선 빅톨 위고의 저택 앞에서도 기어이 누드 촬영을 해 내었습니다. 레미제라블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빅톨 위고의 저택 앞에서의 누드는 내 생애 최고로 의미 있는 작품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거리가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미 태양은 그 빛을 찬연하게 쏟아내었습니다.
나의 오감은 살아서 생동을 하고 있었고, 카메라는 아직도 만족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졸리의 거대한 몸집은 에너지를 마구 소진한 탓인지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 아침 내내 쉴새 없이 침을 튀겨가며 재잘거렸거든요. 여왕도 수다라면 절대로 뒤지는 분이 아닙니다. 촉새처럼 작은 여인과, 코끼리만큼이나 우람한 여인은 겉모습만으론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듯싶었는데 의외로 죽이 잘 맞아 아침 내내 파리 시내에 엄청난 소음을 깔아두었습니다. 이제 그녀들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소리들도 점점 가시가 돋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친구 예술가 맞어? 내 생각엔 삼류 포로노작가가 틀림 없을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림없지? 아까 내 궁둥이를 거시기 같이 생긴 쇳덩이 위에 올려놓으라고 할 때부터 알아 봤다니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촬영 끝!"
빌어먹을 .....
파리에 똥침을 놓다. (연재 24)
누드 작품은 한국사진방송에 올려 둡니다.
한국에선 개가 쥔을 닮고, 파리에선 쥔이 개를 닮는다.
내일은 새벽부터 떠날 테다
난 안다. 네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걸을 테다, 생각에 골몰 하며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아무것도 없다해도
외로운 낯선 나그네
고독한 나에겐 낮도 밤도 같으리
저무는 노을의 황금빛도
아폴로 항구 향해 나아가는 돛단배도 보지 않으리
다만 너의 무덤에 다다르면
호랑가시 푸른 가지와 히드꽃 한 아름을 내려 놓으리
- 빅톨 위고 -
루이 13세때에 완공을 하여
" 루아얄(Royale: 왕실) 광장 " 이라고 불렸죠.
혁명 후 " 불가시성의 광장(Place de linvisibilite )
이라는 광장히 어려운 이름이 붙혀졌습니다.
그 후 보주(프랑스 동북부의 산간지역)
주민들이 많은 혁명자금을 내준데 대한 보답으로
" 보주광장 "이란 이름을 붙혔다고 합니다.
보주광장은 우아한 건물들이 사방으로 빙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마당같은 광장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네요.
노트르 담드 파리의 원작자 , 프랑스의 대문호 빅톨 위고의 집도 이곳에 있습니다.
그의 집 앞에서 졸리를 세워 찍었습니다. 물론, 나체로요.
" 몽고메리경의 날카로운 창끝이 보주광장을 창조하였다."
- 빅톨 위고 -
앙리2세와 그의 부하 몽고메리는 루이13세와 안느 도트라슈와의 결혼축하기념으로 마상 창 시합을 벌렸는데,
몽고메리의 창날에 눈을 찔려 죽고 말았습니다.
앙리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그가 죽은 궁궐을 헐어버려 한을 풀었습니다.
후에 앙리 4세가 파리시민들을 위히여 이 공터를 빙둘러 싼 서른 여섯채의 저택을 짓고 ,
그 가운데 광장을 만들어 파리시민의 휴식공간으로 헌납 할 계획으로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공을 보기전에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아마도 원한이 서린곳이었나 봅니다.
졸리,
듬직하고 푸짐한 파리지엔느,
그 새벽 유령처럼 서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 아래 노틀담 사원이 아스라히 보이는 그 강가에서입니다.
아마도 퐁데자르(pont dea arts : 예술교) 아래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다리 바로 아래는 그늘이 져서 그늘에다 모델을 배치하면 그 바깥의 강변은 밝으므로 실루엣의 작품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졸리는 옷을 벗고, 여왕은 코디를 하고, 나는 촬영을 했더랬죠.
졸리는 홀랑 벗고 있는데 저 만큼에서 행인들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 옷줘 옷줘, 빨리 빨리 .... "
다급하여 소리를 치자 여왕이 눈을 흘깁니다.
" 김 선생님! 마드모아젤 리 옷 좀 주세요, 하고 정중히 말씀하시면 안 되나요 ? "
앗차 여기는 프랑스이군요.
여왕이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프랑스인 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지 뭡니까? 행인이 코앞에까지 다가오고 말았네요.
김가중, 파리, 동침, 누드, 한국사진방송
한국사진방송
이 작성자의 게시글
구독하기 더보기
한국사진방송
한국사진방송 기자입니다.
아파트의 입구로 연결되는 긴 회랑은 사진적으로 촬영하는데 적격이었지만, 창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거나 나오는 사람을 조심하며 촬영을 하여야 되었습니다. 대로에서 촬영할 때는 건물의 움푹 패인 곳에 졸리를 끼워 넣어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습니다. 골목 안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아침 용변을 보러 나온 개들을 제외하곤 거의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여왕과 졸리가 골목 안을 스물스물 몰려다니는 요사스러운 기운을 극히 두려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요기는 지린내와 구린내였죠, 파리의 아침은 구린내와 지린내로 시작됩니다. 항상,
스릴이 있는 아침,
때로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위기를 느껴야 될 때도 있었습니다.
여름인데도 파리의 경찰들은 검은 제복을 단단히 챙겨 입고, 허리엔 굵직한 쇠방망이를 차고 있죠. 머리엔 번쩍거리는 헬멧을 쓰고, 검은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한 두명도 아니고, 때로는 10여 명씩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순찰합니다. 검은 제복의 자전거 행렬이 나타나면 누드 촬영을 안 할 때도 괜스리 주눅이 들곤 했죠. 이렇게 벗고 거리를 헤매다 저들에게 걸리는 날엔 우선 그 쇠몽둥이의 세례를 받아 유치장으로 가기 전에 초죽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일단 꽁꽁 숨었다가 그들이 멀리 사라진 후에야 다시 거리로 나서곤 하였습니다.
리옹역 근처의 공중정원도 돌고, 바스틸 오페라 극장 주변과 보주 광장도 돌았습니다. 보주 광장에선 빅톨 위고의 저택 앞에서도 기어이 누드 촬영을 해 내었습니다. 레미제라블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빅톨 위고의 저택 앞에서의 누드는 내 생애 최고로 의미 있는 작품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거리가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미 태양은 그 빛을 찬연하게 쏟아내었습니다.
나의 오감은 살아서 생동을 하고 있었고, 카메라는 아직도 만족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졸리의 거대한 몸집은 에너지를 마구 소진한 탓인지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 아침 내내 쉴새 없이 침을 튀겨가며 재잘거렸거든요. 여왕도 수다라면 절대로 뒤지는 분이 아닙니다. 촉새처럼 작은 여인과, 코끼리만큼이나 우람한 여인은 겉모습만으론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듯싶었는데 의외로 죽이 잘 맞아 아침 내내 파리 시내에 엄청난 소음을 깔아두었습니다. 이제 그녀들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소리들도 점점 가시가 돋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친구 예술가 맞어? 내 생각엔 삼류 포로노작가가 틀림 없을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림없지? 아까 내 궁둥이를 거시기 같이 생긴 쇳덩이 위에 올려놓으라고 할 때부터 알아 봤다니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촬영 끝!"
빌어먹을 .....
파리에 똥침을 놓다. (연재 24)
누드 작품은 한국사진방송에 올려 둡니다.
한국에선 개가 쥔을 닮고, 파리에선 쥔이 개를 닮는다.
내일은 새벽부터 떠날 테다
난 안다. 네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걸을 테다, 생각에 골몰 하며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아무것도 없다해도
외로운 낯선 나그네
고독한 나에겐 낮도 밤도 같으리
저무는 노을의 황금빛도
아폴로 항구 향해 나아가는 돛단배도 보지 않으리
다만 너의 무덤에 다다르면
호랑가시 푸른 가지와 히드꽃 한 아름을 내려 놓으리
- 빅톨 위고 -
루이 13세때에 완공을 하여
" 루아얄(Royale: 왕실) 광장 " 이라고 불렸죠.
혁명 후 " 불가시성의 광장(Place de linvisibilite )
이라는 광장히 어려운 이름이 붙혀졌습니다.
그 후 보주(프랑스 동북부의 산간지역)
주민들이 많은 혁명자금을 내준데 대한 보답으로
" 보주광장 "이란 이름을 붙혔다고 합니다.
보주광장은 우아한 건물들이 사방으로 빙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마당같은 광장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네요.
노트르 담드 파리의 원작자 , 프랑스의 대문호 빅톨 위고의 집도 이곳에 있습니다.
그의 집 앞에서 졸리를 세워 찍었습니다. 물론, 나체로요.
" 몽고메리경의 날카로운 창끝이 보주광장을 창조하였다."
- 빅톨 위고 -
앙리2세와 그의 부하 몽고메리는 루이13세와 안느 도트라슈와의 결혼축하기념으로 마상 창 시합을 벌렸는데,
몽고메리의 창날에 눈을 찔려 죽고 말았습니다.
앙리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그가 죽은 궁궐을 헐어버려 한을 풀었습니다.
후에 앙리 4세가 파리시민들을 위히여 이 공터를 빙둘러 싼 서른 여섯채의 저택을 짓고 ,
그 가운데 광장을 만들어 파리시민의 휴식공간으로 헌납 할 계획으로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공을 보기전에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아마도 원한이 서린곳이었나 봅니다.
졸리,
듬직하고 푸짐한 파리지엔느,
그 새벽 유령처럼 서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 아래 노틀담 사원이 아스라히 보이는 그 강가에서입니다.
아마도 퐁데자르(pont dea arts : 예술교) 아래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다리 바로 아래는 그늘이 져서 그늘에다 모델을 배치하면 그 바깥의 강변은 밝으므로 실루엣의 작품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졸리는 옷을 벗고, 여왕은 코디를 하고, 나는 촬영을 했더랬죠.
졸리는 홀랑 벗고 있는데 저 만큼에서 행인들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 옷줘 옷줘, 빨리 빨리 .... "
다급하여 소리를 치자 여왕이 눈을 흘깁니다.
" 김 선생님! 마드모아젤 리 옷 좀 주세요, 하고 정중히 말씀하시면 안 되나요 ? "
앗차 여기는 프랑스이군요.
여왕이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프랑스인 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지 뭡니까? 행인이 코앞에까지 다가오고 말았네요.
김가중, 파리, 동침, 누드, 한국사진방송
한국사진방송
이 작성자의 게시글
구독하기 더보기
한국사진방송
한국사진방송 기자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