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누드여행기 (파리에 똥침을 놓다. 27번째)
마타하리의 지랄발광,
오늘은 몽마르트에서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파리는 기원전 50년경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 로마가 됩니다.
로마는 종교에 관대하여 골(수탉이란 뜻, 프랑스의 원주민)족들의 고유 신앙인 드루이드교를 박해하지 않았으나 서기 50년경의 클라디우스황제 시절에 드루이드교가 인신 공양울 금지하고 몽마르트 근처에 머큐리 신전을 세웠습니다. 곧 이어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파리 최초의 신부 생 드니(saint denis)와 그의 동조자들은 머큐리상을 박살을 내 버리고 맙니다. 밤중에 몰래 훼손 되었던 우리나라 단군상이나 마을 어귀의 장승과는 달리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떳떳하게 말입니다. 머큐리상에게 절하는 드루이드교 신도들이 우상숭배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신념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현재의 시테섬의 꽃시장 근처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아마도 그 유명한 노틀담 사원이 있는 그 자리일겁니다. 드니는 감옥에서 꼿꼿이 앉아 신에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저를 짐승의 먹이로 만들어 주십시요, 저는 신의 곡물이니 짐승의 이빨에 찢겨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빵이 되고 싶습니다. 짐승의 뱃속을 저의 무덤이 되게 해주시고 제 시체 한조각도 남기지 말아 주십시오, 하늘에 계신 주님이시여 저는 이제 주이신 당신의 곁으로 갑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신은 정말 몰랐고, 로마 군인들이 그의 소원을 들어 주었습니다. 몽마르트 근처에서 드니는 목이 잘렸습니다.
그런데 드니의 몸뚱이가 목을 집어 들고 걷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 몸뚱이는 6km쯤 떨어진 생드니 거리까지 걸어갔다가 과부 카튈라라를 만나자 갑자기 푹 고꾸라졌습니다. 카튈라라는 양지에 그를 고이 묻어 주었습니다.
드디어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삼았습니다.
100년쯤 지나 성녀 주느비엔느는 드니가 묻힌 곳을 성역으로 만들고 바실리카 성당을 짓고 마을의 이름도 생 드니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드니의 무덤에서는 샘물이 흘러 나왔는데 그 샘물은 매독의 치료에 효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부터 매독을 프랑스병이라고 할 만큼 프랑스엔 매독이 성했는데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인들이 프랑스 여성들에 의하여 매독에 많이 걸려 드니의 샘에서 치료를 하여 다 낳았다고 합니다. 드니는 정녕 성인입니다. 적국인 독일인들의 추악한 짓거리로 생긴 병을 치료까지 해주었으니...
몽마르트(MONMARTRE)란 순교자의 산 (MONSMARTYRUM)으로 드니의 순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오늘 날 몽마르트는 예술가들의 고향입니다.
몽마르트와 인연을 맺은 좀 별난 예술가를 소개 할까 합니다.
스파이,
제임스 본드나 간첩 이수근 말고 세기의 여간첩이란 닉네임으로 불렸던 "마타하리" 라는 여예술가의 삶을 추적해 볼까 합니다.
예술 하면 반드시 따라붙는 단어가 있습니다.
술을 떠 올릴 수가 있겠지요. 술 하면 따라붙는 단어가 하나 더 있을 겁니다.
창녀,
(요즈음 우리나라에선 윤락녀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하면 윤리가 떨어진 여자란 뜻인데 이보다는 오히려 창창해 보이는 창녀가 더 나을 듯싶어 창녀로 표기 하겠습니다.)
몽마르트 언덕아래엔 창창한 창녀들(이 여행기 어드메쯤엔가 제가 얘기한 “창녀들에게 뭇매를 맞고”에 나온 창녀들은 다 할머니 창녀들로 그다지 창창하지 않았지만요.)이 흥청거렸습니다. 지금도 몽마르트 언덕아래의 피갈역이나 불량슈역 주변은 파리의 대표적인 환락가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타하리는 그 지역에서 몸을 팔고 있는 별로 창창하지도 않은 싸구려 창녀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녀가 배회하던 그 거리는 당시만 하더라도 싸구려 인생들의 거리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예술의 중심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던 파리로 전 세계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지만 파리중심가는 집값이 비싸 가난한 예술가들은 택도 없고 방세 싸고 먹거리가 싼 시골지역이던 이 지역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농가의 행랑채를 세내고 허름한 헛간은 선술집과 카페로 사용하였습니다.
누군가가 방앗간을 개조하여 술집을 내었습니다. 지붕엔 낡은 풍차가 빙글빙글 돌았고, 그 아래에선 온갖 부류의 예술가들과 꽃처럼 예쁘게 화장한 창녀들이 어울려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그 풍차 술집은 대번에 명성과 돈을 거머쥐게 되어 멋들어진 건물을 올렸지요. 그곳은 여전히 지붕 꼭대기에 풍차가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지금은 네온사인으로 거대하게 만든 풍차입니다만, 그 술집은 빙글빙글 돌거나 땅속으로 꺼졌다가 솟아오르는 우아한 무대도 설치하였습니다. 그 무대엔 파리의 뭇 여성들 중 고르고 고른 팔등신 미인들로 구성된 무희들이 축구공만한 유방을 드러내고 마구 흔들다간 대나무 쪽같이 쫙쫙 쪼개지는 다리를 번쩍 번쩍 들어 올리며 가랑이 가운데를 유감없이 보여주곤 했습니다.
캉캉춤(CanCan)이었죠.
이 술집은 100년도 넘게 융성하여 파리의 명물 중 명물이 되어 있습니다.
카바레 (Cabaret) 물랭루즈(Moulin Rouge)가 바로 그곳이죠.
“물랭루즈란 빨간 방앗간”이란 뜻입니다.
어느 날 마타하리는 빨간 방앗간을 찾아갔습니다.
이미 무희나 창녀로서 노계에 속하는 나이 탓에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갖은 노력 끝에 지배인을 자신의 배위에 올리고 빙글빙글 돌리는데 성공한 그녀는 지배인의 의해서 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지배인은 창녀가 하룻밤 몸 보시를 했다고 무대에 서게 하는 그런 얼빠진 위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파리지엔느들이 서고 싶어 하는 그 무대에 더구나 솔로 주인공으로 한물간 그 창녀를 서게 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녀와 하룻밤은 그에겐 그야말로 “뿅”이란 단어 외엔 더 이상 골라 낼 단어가 없었던거죠. 뽕(마리화나)을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사실 마타하리는 동양의 방중술을 익혀 그 방면에선 달인이었습니다. 지배인은 자신을 완전히 녹였던 그 농염한 방중술에 버금가는 춤 솜씨를 가졌다면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무조건 그녀를 무대에 세웠습니다. 세계적인 술집의 지배인정도 되면 예사인물은 아닐거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의 안목은 적중하였고 그 밤이 지새기도 전에 세상은 바뀌어 있었습니다.
인생이 바뀌던 그 밤 이전에 그녀는 몽마르트 언덕위의 화가나 사진작가들의 누드모델노릇을 해주면서 벌어들인 얼마 안 되는 푼돈으로 허기를 메우고 있었습니다만, 누드모델로서도 두각을 나타낼 만한 몸매는 아니었습니다.
화가 피카소는 우시장에서 거간꾼들이 소를 흥정할 때 하듯 그녀를 홀랑 벗겨서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주물러보다간 자신의 모델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차가운 말 한마디와 함께 옷을 입을 새도 없이 내 쫒아버렸습니다. 피카소의 아틀리에서 거리로 내동댕이치듯 쫒겨나고 말았습니다. 피카소도 그녀의 유방과 허리 엉덩이 같은 겉모습만 보았지 가랑이사이의 속 모습은 보지 못 했던 거죠. 피카소를 위시한 화가들과 만 레이, 앙리 카르티에 브렛송 같은 사진작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그녀는 작전을 바꿔 물랭루즈의 지배인을 유혹하여 자신만의 테크닉으로 뿅망치를 휘둘렀던 것입니다.
“고기가 물을 만나다.”는 마타하리를 위한 속담이입니다.
그녀는 무대에 오르자 마자 다른 무희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과감하고 요상하고 망측하고 숭악한(?) 춤을 열정적으로 추었습니다. 인도나 자바, 수마트라에서 살면서 배워 두었던 신비로운 동양춤에다 자신이 창안한 음란하고 독특한 몸짓을 가미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춤이었습니다. 그녀의 춤에선 동양의 신비로운 색체와 코부라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묘한 카리스마가 느껴졌습니다. 파리사람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그녀의 허리아래에서 열광(지랄발광의 지적인 표현)을 하였습니다. (아 지랄발광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넘어갑니다. 몇 해전 동대문 운동장의 마지막 철거가 있던 날 필자가 그곳에서 동대문 운동장의 마지막 역사를 위한 살풀이 누드퍼포먼스를 거행하였는데 그때 그 퍼포먼스의 명칭이 “지랄발광”이었죠, 터址. 메울辣, 보낼發, 빛光, 이 함자풀이였는데, 곧 그때 그 작품들도 연재하기로 하겠습니다.)
다음 날이 채 새기도 전에 이제는 유럽전체가 지랄 발광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기자들은 마타하리의 뒤 꼭지에도 자지러졌고, 파파라치들은 엉덩이의 실룩임에도 자지러졌습니다. 기자들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좋게 말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똑바로 말하면 날조 협잡꾼이라고 말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타하리의 재능에 기자들의 재능이 합쳐지자 마타하리의 전설은 눈덩이처럼 커져갔습니다. 오늘날 마타하리의 전설이 일치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기자라고 불리는 그자들 때문입니다.
계속
관련자료의 자세한 캡션과 누드작품은 한국사진방송에 수록해 둡니다.
네이버 등 포털 검색창에 <한국사진방송> 치세요.
www.koreaarttv.com
http://www.koreaarttv.com/section.php?thread=11&flashMenu=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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